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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는 단일한 시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초반과 후반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초반은 여전히 80년대 영화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실험적이거나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반면 후반으로 갈수록 자본과 기술의 급속한 유입, 장르적 다양성, 그리고 멀티플렉스 등장 등으로 인해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이 대중성과 흥행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90년대 초반과 후반 영화가 어떻게 다르게 전개되었는지를 배경 설정, 장르 다양성, 흥행 방식 세 가지 측면에서 자세히 비교해보겠습니다.
배경 설정의 흐름 변화
90년대 초반의 영화들은 대체로 ‘한정된 공간’ 속에서의 정서와 갈등에 집중했습니다. 한국영화의 경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교실이라는 공간을 통해 권위와 폭력 구조를 그려냈고, <서편제>는 한국 전통 문화의 쇠퇴와 가족 해체를 산골 마을과 국악 무대라는 공간을 통해 조용히 보여줬습니다. 이런 배경 설정은 공간 자체보다 인물의 심리와 사회 구조에 집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헐리우드 역시 <필라델피아>나 <레인맨>과 같은 작품들에서는 병원, 가정, 법정 등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인간의 내면과 사회적 편견을 이야기했습니다. 반면 90년대 후반 영화는 공간의 확장, 즉 ‘배경의 영화화’가 두드러졌습니다. <타이타닉>은 실제 배의 구조를 완벽하게 재현해 바다라는 공간을 역사와 감정이 얽힌 거대한 무대로 만들었고, <매트릭스>는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다층적 배경을 통해 현대 문명과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국영화 <쉬리> 역시 서울 시내 곳곳을 영화적 공간으로 활용해 도심 액션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런 배경의 변화는 단순한 공간이 아닌 ‘스토리의 일부’로서 배경이 영화 서사와 감정선에 큰 역할을 하게 된 전환점이었습니다.
장르 다양성의 확산
90년대 초반 영화는 사회적 메시지나 예술적 표현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한국영화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장군의 아들>, <그들도 우리처럼> 등 사회 문제나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헐리우드도 <사선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 <필라델피아> 등 드라마 장르가 주류를 이뤘고, 작품성 중심의 영화가 강세를 보였습니다. 이런 영화들은 대중의 감성보다는 지적·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집중했으며, 흥행보다 비평의 영역에서 더 큰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상황이 급변합니다. 헐리우드에선 <쥬라기 공원>을 시작으로 <맨 인 블랙>, <토이 스토리>, <타이타닉>, <아마겟돈> 등 SF, 애니메이션, 재난, 멜로, 액션 등 다양한 장르가 동시에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기술 발전과 함께 대중의 입맛이 변화한 결과였습니다. 한국영화도 <쉬리>를 기점으로 <텔미썸딩>, <공동경비구역 JSA>, <엽기적인 그녀> 등 장르 혼합형 영화가 급증하며 상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갖춘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특히 로맨스와 스릴러, 액션, 휴먼 드라마가 결합된 복합장르 영화들이 관객에게 신선함을 주며 후반기를 장악했습니다. 이처럼 후반은 ‘관객 맞춤형 장르’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흥행 방식과 시장 구조 변화
90년대 초반의 영화 시장은 지금보다 훨씬 단순하고 구조화되지 않은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홍보 수단은 대부분 신문 광고, 영화 평론, 방송사 리뷰에 한정되어 있었고, 입소문이 흥행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개봉관 수도 적었고, 전국 단위로 빠르게 퍼지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영 기간이 길고, 관객이 서서히 늘어나는 ‘롱런 흥행’이 많았습니다. 헐리우드 영화도 국내 도입 시점이 다소 늦었고, 영화 선택권이 비교적 제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은 멀티플렉스의 등장을 시작으로 영화 산업의 전반적인 구조가 바뀌게 됩니다. 한국의 경우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이 등장하면서 동시에 수십 개의 스크린에서 다양한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습니다. <쉬리>는 대대적인 TV 광고, 제작발표회, 스타 마케팅 등을 통해 상영 전부터 관객의 기대치를 끌어올렸고, 개봉 첫 주말에만 수십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기존 패턴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헐리우드 역시 <타이타닉>을 기점으로 글로벌 동시 개봉, 라이선스 상품 판매, OST 마케팅, 각국 언어 더빙 등 멀티 콘텐츠 전략을 사용하며 수익 구조를 다각화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영화는 단순한 콘텐츠를 넘어 브랜드화되었으며, 관객은 소비자이자 팬으로서 흥행을 이끄는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흥행은 더 이상 운이 아니라 전략이 되었고, 콘텐츠 자체보다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90년대 초반과 후반의 영화는 겉보기엔 같은 시기 같지만, 그 안의 질감은 매우 다릅니다. 초반은 메시지와 예술성 중심의 진지한 영화들이 많았고, 후반은 장르와 기술, 자본을 바탕으로 한 대중친화적 영화가 강세를 이뤘습니다. 이 두 시기는 서로를 반영하면서도 각자의 색채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의 영화 산업 구조와 감성 코드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과거의 변화를 되짚어보며, 지금 우리가 보는 영화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